마비노기/60분 전력

카즈밀레)열병 0708 #마비노기_전력

Tecla 2017. 7. 15. 17:45

여신은 약속했다. 늙지 않는 육체와 죽지 않는 영혼을, 끊임없는 성장력과 뭐든지 해낼 수 있는 잠재성을.

낙원의 진실을 깨닫지 못했던 에린의 인간들과 달리 밀레시안들은 그 모든것을 서두에 약속받으며 이 세상으로 초대되었고 그 약속은 말 그대로 이뤄지며 밀레시안들을 영웅으로 불리게 만들었다.

밀레시안은 삼일 밤낮을 달려 티르코네일의 설원에서 반호르까지 말없이 뛰어다니기도 했고 열흘을 그 자리에서 기다려 기다려 오스나사일에 있는 미니곰을 퇴치하기도 했다. 

가끔 밤중에 숨어들어 마을을 노리는 이름모를 강적에게 쓰러져 정신을 잃기도 하지만 곧 신비로운 별의 빛과 함께 부활. 

지나가던 던바튼의 농부는 그때 밀레시안의 모습을 그야말로 라이미라크님의 기적이며 모리안의 기사였다고 증언했다. 

천지를 울리는 장엄한 빛의 울림과 치솟아오르는 빛의 날개, 흩날리는 검은까마귀의 깃털과 손짓하나에 모여드는 수십마리의 까마귀 떼들. 

농부는 지금도 가끔씩 그날밤의 하늘을 까맣게 뒤덮던 까마귀떼들이 생각난다며 던바튼 북쪽의 농경지 한켠에 큰 원을 덧그리며 당시의 위치를 설명했다.

열심히 받아적는 벨테인의 견습기사의 눈에 잠시 존경심과 동경이 깃들었지만 농부는 밀레시안의 동선을 설명하던 손을 내리며 작은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 대단한 능력을 가지고 왜 검은너구리 가족에게 졌는지를 몰라..”

“…….”


밀레시안의 정보를 받아적던 견습기사는 할말을 잃었고 농부는 떠나갔다. 그리고 수첩머리의 이름모를 강적의 문구에 두줄을 그어넣은뒤 이름을 고쳐 적어넣었다.

반호르까지 걸어서 교역에 오스나사일 미니곰퇴치, 던바튼 북쪽에 나타난 검은너구리가족 퇴치(행동불능1번).

여기까지가 밀레시안이 게이트에 오기 전에 있었던 일인 동시에 벨테인의 견습기사의 임무의 종착지, 

임무를 끝낸 벨테인의 견습기사는 다시 한번 주변을 둘러 본 뒤 게이트로 이동하는 푸른 여신의 날개를 꺼내들었다.

임무를 완수한것 치고는 어두운 표정이였지만 실망했다기 보다는 아무래도 좋다는 얼굴이였다. 이런 조사결과로 뭔가 실마리를 잡을 수 있을까, 

기사는 쓸데없는 걱정을 혀끝으로 우물거리다가 날개를 흔들었다. 푸른밀납이 녹아내리며 주변의 풍경도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다시돌아온 게이트는 떠나왔을때의 분위기 그대로 우중충하고 날이 뾰족뾰족하게 선 느낌이였다.

카나는 여전히 약초를 넣은 무언가를 끓이고 있었고 아이르리스는 명상하는 틈틈히 곁눈질을 하며 병동쪽을 살피고 있었다. 로간과 엘시는 임무로 나가있었고 카오르는 슈안과 함께 서류업무중, 

슈안은 당연하게도 자신의 사무실에 틀어박혀 전면중지된 밀레시안의 임무에 대한 사유서를 작성하느라 정신이 없는 모습이였다.

임무용 로브의 후드를 벗는 디이를 알아채주는것은 바깥쪽에 나와있던 카나뿐.


“대체 뭘 넣고 끓이는 거길래 주방에서 안만들고 밖에서 만드는거야?”

“음, 이것저것이요.”


카나는 환하게 웃으며 대답하고는 무언가를 한줌 더 집어넣었다. 언뜻 보기에는 베이스허브 같아 보였지만 풍겨오는 냄새는 향긋하고 부드러운 풀의 향기가 아닌 어딘지 스모키하고 끈적할것 같은 달콤한 향기.

디이는 냄비안을 들여다보지 않기 위해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리며 그렇구나 하고 작게 대답을 한뒤 아튼시미니의 이름을 읊조렸다. 어차피 먹을것은 내가 아니니까. 무엇을 먹어도 죽지는 않는 영우의 운명이란 참으로 가혹하다는 것을 깨달으며 게이트 안으로 들어갔다. 죽을 먹어야 하는 사람은 게이트의 안쪽에 누워있었고 디이가 보고를 해야하는 상급기사도 병동의 한켠에 앉아있었다. 단지 그 바쁘신 분이 아직도 게이트에 머무르고 있는지가 문제일텐데.

디이가 부엉이들이 머무는 담벼락과 병동중 어느곳을 먼저 가야할지 고민하는 찰나 게이트 먼곳에 앉아있던 아이르리스와 눈이 마주쳤다.

명상중 딴짓을 하고 있던것을 들킨것이 민망한건지 아이르리스는 홱하고 고개를 돌리며 눈을 감았다.

이미 다 들켰을텐데, 디이는 자신이 눈치챌 정도면 저 멀리있는 상급기사의 눈에는 훤히 들여다보였을 것이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그렇게 훤히 들여다보이는 것은 디이의 발걸음도 마찬가지였다.

게이트 입구에 들어설때부터 따끔따끔하게 느껴지는 공기는 조금 더 무겁게 내려앉았고 디이는 아이르리스의 반응과 더불어 그 기사가 여전히 게이트에 남아있다는 것을 실감하며 발걸음의 방향을 병동으로 고정시켰다.

타박타박 발걸음이 다가설수록 낯이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평소와 다름없이 조잘조잘 잘도 떠드는 목소리이지만 오늘은 어딘가 가볍게 들떠있었고 가끔씩 음정이 이탈하기도 하며 낮게 잠긴 거친음을 뱉어내기도 했다.

낮은 목소리가 나올때마다 목소리의 주인은 잔뜩 당황한듯 아니, 잠깐만요. 이건 그러니까.. 하고 마실것을 찾아 두리번 거렸고 대게 그럴때면 이거 마시고, 조용히 좀 있어. 라는 낮은 목소리가 뒤따라 붙으며 밀레시안의 목소리를 압도했다.

디이는 문의 경계라고 할것이 없는 병동의 외곽에 멈춰 선뒤 가장 가까이 있는 나무기둥을 손등으로 두드렸다.

가볍게 울리는 노크소리에 두사람의 주의가 디이에게로 돌려졌다.

디이는 가볍게 헛기침을 하고는 조사해왔던 수첩을 카즈윈에게 내밀었다.


“지령대로 조장님이 이전 게이트에서 외출하셨을때부터 어제까지 있었던 일을 모두 조사해왔습니다”

“수고했어”

“잠깐?! 디이는 내 조원인데 왜 카즈윈이 마음대로 부려먹어요? 이거 지금 내가 병가냈다고 우리조에 마음대로 관여하는거 아니에요?! 슈안이 뭐라고 했을텐데?! 슈안이 뭐라고 많이 했을텐데?!”

“아, 그건말이지 조장…..님아…”

“니임? 조장 니-임?!”

“아핫, 그게.., 나- 아니 저도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존댓말을..”



속사포처럼 쏟아내는 밀레시안의 불만에도 카즈윈은 묵묵부답, 하루 반나절동안 꼬박 울라대륙을 샅샅히 뒤지고 돌아다니던 노력의 결정체는 카즈윈의 손짓 두세번에 낱낱히 파악당했고 이내 작은 수첩의 모습으로 되돌아가버렸다.

마지막 이름모를 마물의 이름을 수정한 것까지 꼼꼼하게 살펴본건지 카즈윈은 너구리.. 하아, 너구리라.. 하는 작은 혼잣말을. 

디이와 밀레시안의 만담아닌 말장난이 이어질것 같은 분위기에 카즈윈은 그대로 수첩을 디이에게 돌려주며 대화를 중단시켰다.


“됐어. 아픈 애한테 말붙이지말고 돌아가보도록.”

“…네, 알겠습니다.”


디이는 밀레시안과 길게 대화를 나누지 못한것이 못내 아쉬운 표정이였지만 수첩을 받아들고는 그대로 퇴장, 밀레시안만이 딱부러지게 경례를 하고 사라지는 디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카즈윈에게로 그 시선을 돌리며 침대를 내리쳤다.


“대체 애한테 뭘했길래 저렇게 주눅이 바짝 든거에요?!”

“기강이 바로잡힌거겠지”

“우리 애는 자유롭고 즐거워하는게 장점인데!!”

“자유와 즐거움은 일정한 규율위에 세워져야 진짜 즐거운법이야. 다른 조 조장앞에서 반말하는건 서로에게 불편하잖아?”


카즈윈은 자신이 틀린말을 했냐는 표정으로 밀레시안을 가볍게 내려다보았다. 깔보는 것은 아니지만 가뜩이나 낮은 침대의 높이와 보통의자보다 조금 높은 의료용 스툴의 높이차가 밀레시안으로 하여금 형용할수 없는 패배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밀레시안은 분한듯이 시트를 모아쥐었고 거친 숨을 진정시키기위해 입을 다문채 천천히 코로 숨을 들이마셨다. 깊숙히 들이마신 숨은 한숨같은 기세로 입을 통해 뿜어져나왔지만 그 온도는 평상시보다도 높아보이는 모습, 목덜미와 뺨은 붉게 달아올라있는것은 물론 흐트러진 앞머리에는 진땀이 송골송골 베어나와 몇몇 머리카락이 달라붙어있었다.

기세는 등등하게 살아있지만 아무리봐도 아픈 환자의 모습, 카즈윈은 좀처럼 볼 수 없는 아픈 밀레시안의 모습을 흥미롭게 관찰하다가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밀레시안에게 질문했다.


“그래서..”

“….?”


갑자기 나지막하게 목소리를 낮춰오는 모습에 밀레시안이 고개를 뒤로 빼며 카즈윈을 경계했다.


“물렸어?”

“뭐가요?”

“너구리한테 물렸냐고”


카즈윈은 밀레시안이 마지막으로 사냥한 네임드 몬스터에 대해 물었고 디이가 보고한 적어도 한번 이상 행동불능이 되었음에 대해 언급했다.

아니 그런 쪽팔린 모습은 어디서들 그렇게 지켜보고 증언하는거래요? 하고 질색을 하는 밀레시안이 하..한번 죽긴했는데 하고 양심을 속인 고백을.

한번이고 두번이고는 관심이 없으니 사실대로 대답하라는 카즈윈의 엄한 으름장에 밀레시안이 아 그래요 세번 죽었어요 하고 사실대로 실토하자 카즈윈은 다시한번 고개를 갸웃거리며 숙였던 몸을 바로세웠다.


“세번 죽을정도면 확실히 물렸겠네..”

“아 왜 자꾸 물린거에 그렇게 집착을 해요”

“왜냐니, 다른것도 아니고 너구리 잖아?”

“너구리가 물면 너구리안슬로프로 변하기라도 한데요?! 왜자꾸 물린거에 집착하냐니까?”


밀레시안은 아직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카즈윈의 질문에 반감을 드러내었다. 

카즈윈은 정말모르는건지 부끄러워서 모르는 척 하는건지 감을 잡지 못하는 표정으로 잠시 밀레시안을 바라보다가 마시던 물컵을 밀레시안에게 내밀며 진지하게 되물었다.


“그럼 물 뿌려봐도 괜찮아?”

“갑자기 물은 왜뿌려요?”

“……”


카즈윈은 밀레시안의 상태를 다시한번 체크했다. 비실비실 하고는 있지만 상반신을 일으킬만한 힘은 남아있고 곧잘 팔을 휘두르며 위협을 하더라도 힘은 실리지 않은 모습, 조금 더 의자를 뒤로 빼면 안정거리이지 않을까, 생각한 그대로 의자를 뒤로 밀어낸 카즈윈이 조심스럽게 말을 덧붙였다.


“혹시 공수병이라고 알아?”

“소울스트림이 진짜 스트림인지 말로만 스트림인지 머리부터 담궜다와볼래요?”


카즈윈은 정말로 밀레시안에게 물을 뿌릴 것처럼 컵을 기울이는 순간 밀레시안은 손을 뻗어 텅 비워져가는 물병을 움켜잡았다. 

물병의 공격력을 믿느니 맨손으로 공격하는 것이 훨씬 더 효율적으로 보이지만 어차피 0과 1의 싸움이였다.

닿느냐 안닿느냐. 원거리무기를 조준중인 카즈윈과 근거리에서 움직이지 못하는 밀레시안에게 한뼘의 차이는 승부에 크나큰 차이를 만들 결정적인 포인트였다. 

여차하면 병을 던지는 수도.., 병동에 어울리지 않는 긴박한 배경음이 흐르며 긴장감이 고조되는 가운데 발랄한 목소리가 양손가득 넓은 대접을 들고 병동으로 들어섰다.


“짜잔! 조장님-! 카나가 영양가득한 독버섯회복스프를 끓여왔어요! 이것만 있으면 피로가 뚝! 감기가 뚝! 모든 질병이 뚝뚝! 떨어져나가는 마법의 영양스프!”


잔뜩 신이 난 덕인지 카나는 카즈윈이 안에 있는지를 살피지 않은채 소리를 높이며 그릇을 머리까지 번쩍 들어올려 보였다.

밀레시안의 취향을 반영한것인지 언제나 검소하고 단순한 단색의 식기만 사용하던 벨테인의 그릇들과 달리 카나가 들고 있는 양손 그릇은 토끼와 베이스허브가 번갈아 그려진 아기자기한 모습이였다.

환한 미소와 모락모락 피어나는 김, 직접 푹 끓여낸 영양스프에 세심하게 그릇까지 세팅한 조원의 모습이 귀엽지 않을리가 있을까.

하지만 밀레시안의 표정은 그렇게까지 밝은 모습이 아니였다. 시선은 카나를 맞이하고 있는 동시에 카즈윈의 방향으로 내밀어진 병은 여전히 좌우로 흔들리고 있었다.

병이 흔들리며 애타게 무언가를 말하고 있는 모습이 제법 애처롭기까지 했지만 문제는 그 의미가 무엇이라는건지.

다만 그 뜻이 이리오라는건지 가라는건지, 일단 조장으로서의 체면 때문인지 기울이던 컵을 자연스럽게 들어 물을 마시는 척 고개를 돌린 카즈윈이 일부러 헛기침 소리를 내자 신이나서 뛰어들어왔던 카나가 화들짝 놀라며 그릇을 끌어당겼다.

찰랑여야할 묽은 스프가 그릇에서 한방울도 튀어오르지 않는다는 것은 곧 밀레시안의 운명도 더이상 찰랑거리며 흘러가지 않을것이라는 뜻. 

밀레시안은 자신의 운명을 직감했지만 사방이 병동이였고 시선이 닿는 모든곳이 게이트의 울타리 안이였다. 

제아무리 역경을 뛰어넘어온 전설의 영웅일지언정 이번만큼은 벗어날 길이 없어보였다.

카나는 우물쭈물 밀레시안을 한번 돌아본 뒤 카즈윈을 향해 고개를 끄덕거리며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


“죄송해요, 헤루인조장님. 저는 헤루인 조장님이 벌써 돌아가신줄 알고..”

“신경쓰지마.”


카즈윈은 반쯤 돌려앉은 자세로 눈만 돌려 짧게 대답했다. 매우 짧은 관찰동안 카즈윈의 시선의 시선이 카나의 그릇에 머물렀다 

떨어진것을 놓치지않은 밀레시안이 소리없이 카즈윈의 이름을 연발하며 병을 흔들었다.

왜 저렇게 멀리 앉은거람, 밀레시안은 곁에 앉아있었다면 벌써 10번은 더 찌르며 꼬집었을 옆구리를 노려보며 카즈윈에게 도움을 바라는 시선을 보내왔다.

언뜻 보기에도 그릇은 2인분 이상의 용량, 하지만 카나의 손에는 1인분의 스푼이 들려있었고 밀레시안은 마지막 희망을 담아 카나에게 물어왔다. 

카나는 밀레시안의 말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와아, 카나가 카즈윈도 먹으라고 일부러 넉넉하게 가지고 온거구나?”

“네..? 아, 아닌데.. 이건 조장님 그릇이거든요. 하지만 저 엄청 넉넉하게 만들어 놓았으니까 지금 다시 헤루인조장님의 몫을 가지고 올께요! 저녁분량까지 잔뜩 만들어 두었으니까요!”


카나가 밀레시안의 말에 당황스러워하는 것은 아주 잠시동안의 일이였다. 카나는 곧 신이나서 카즈윈을 돌아보았고 카즈윈은 괜한말을 하지 말라며 조용히 밀레시안을 노려보고는 카나에게 고개를 가로저어보였다.

굳이 말을 덧붙이지 않고 고개만 가로저은 것은 카즈윈의 성격탓도 아니였고 빠르게 변화하는 이야기의 흐름에 적응하지 못해서도 아니였다. 

모든것은 조장으로서의 관록, 비밀주의 알반에서 오랫동안 살아 남을 수 있는 삶의 지혜.


“네..? 아.. 그러시구나, 헤루인 조장님은 벌써 식사약속이 있으신거군요? 슈안님과 함께하시려나..?”


아직 뭐라고 한마디도 안했는데?! 라고 밀레시안이 따지려고 했지만 카즈윈은 구태여 오해를 바로잡지 않은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침묵은 금이였고 무기인 동시에 최고의 방패. 슈안과 식사할 예정은 없었지만 그렇게 이유를 찾아붙인것은 어디까지나 카나의 착각이였으니 카즈윈은 아무런 거짓말도 하지 않은셈이였다.

카즈윈은 유달리 힘주어 입을 꾹 다문채 밀레시안의 침대위로 테이블을 고정시킨뒤 카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카나가 조금 긴장한 얼굴로 그릇을 건네주자 카즈윈의 무표정한 얼굴에도 사뭇 긴장감이 내려앉았다. 

왜 스프인데 안흔들리는 거지. 카즈윈이 스프라는 음식에 대한 범위를 새롭게 인식하고 있는동안 카나는 밀레시안에게 식사 맛있게 하세요! 아직 많이 있으니까 더 드시고 싶으시면 언제든지 제게 말을 걸어주세요! 라는 말을 남기며 종종걸음으로 병동을 떠나갔다.

카즈윈이 스프를 받아드는 동안 타이틀을 교체한 밀레시안이 희망없는 눈으로 저녁까지 먹어야하는건가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카즈윈은 잠시 밀레시안을 측은한 눈으로 바라보았지만 곧 다시한번 스프속 쟤료를 훑어보고는 밀레시안의 테이블 위로 그릇을 내려놓았다.


위스키를 넣고 푹 끓인 독버섯에는 분명 뛰어난 해독작용이 있었고 베이스허브와 선라이트허브는 원기를 북돋기에 아장 좋은 선택이였다. 

버섯의 풍미를 끌어올리기 위해서인지 베이스로 개암버섯콘소메를 사용한 것 같았지만 어디까지나 버섯과 양파를 뭉근하게 끓여녹인 것이기에 크게 해가되지는 않을터, 세가지, 아니 네가지 이상의 음식이 결합된 것인지 요리 자체는 F랭크인지 C랭크인지 모를 무언가였지만 카즈윈의 시선에서도 대체 이 찰랑거리는 젤리의 재질이 무엇인지 알 길이 없어보였다. 

중간중간 뭉게진 무언가가 버섯사이에 흔들리는것을 유심히 보던 밀레시안이 스푼의 뒷면으로 찰기를 확인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응고제…를 너무 많이 넣어 뭉게진 마법의 콩두부네요.”


과연 그래서 두부처럼 국물들이 굳은것인가, 카즈윈은 언뜻 납득이 갈만한 밀레시안의 추측에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이려 했지만 곧 마음을 가다듬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버섯스튜에 이것저것 다른 버섯의 요리와 포션을 넣은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왜 갑자기 두부를 넣었다는 것인지. 

카즈윈이 두부? 하고 입모양으로 되묻자 밀레시안은 결심한 표정으로 한스푼 크게 두부부분을 떠내어 입안으로 우겨넣었다. 

담갈색과 황토빛 콘소메의 중간적세계적인 빛깔의 스튜가 밀레시안의 입으로 호로록 빨려들어가며 맛을 느낄 새도 없이 목너머로 흘러들어갔다. 

삼켰다기보다는 스스로 빨려들어간 느낌, 카즈윈은 차마 맛있어? 라고 묻지는 못한채 건강해지는 느낌이야? 하고 물었고 밀레시안은 말없이 수저를 내밀었다.

카즈윈은 밀레시안의 교체된 타이틀을 한번 바라본뒤 정중하게 수저를 거절했다.

팔짱을 끼며 턱을 괴는척 입을 가리는 것이 여간 고단수가 아닌게 아니였다.


“치사하게 혼자만 살아남으려고”

“너 타이틀 하루 한번만 변화된다며. 이미 늦은거 알고 있어.”

“내일 일은 생각안하죠?”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해야지.”


카즈윈은 여전히 입을 가린 모습이였지만 그 손가락사이에는 좀처럼 보기 힘든 진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정작 환자인 밀레시안은 카즈윈과 입씨름을 하느라 조금 지친듯 모습인데도 카즈윈은 그런 지친 모습이 못내 즐거운 모양이였다.

확실히 아픈사람에게 대놓고 말할 수는 없지만 지금 이 순간은 좀처럼 보기힘든 밀레시안의 새로운 일면. 매순간이 처음보는 표정이였고 매 순간이 처음듣는 목소리였다.

은근히 약화된 전투력이라든가 평소라면 기대오지 않았을 이것저것의 심부름이 카즈윈으로 하여금 새로운 즐거움을 느끼게 만들고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 인사를 건네오는 밀레시안의 표정이 전에 없이 멍해보이는 것에 놀라 손을 얹었을 때까지만 해도 원인을 알 수 없는 질병에 잔뜩 곤두서 있었지만 급하게 파견으로 내보낸 견습기사의 조사결과를 보고받은 뒤부터는 완전히 안심한 상태, 밀레시안은 특별한 질병에 걸린것도 누군가의 저주에 걸린것도 아닌 그저 지친것일 뿐으로 카즈윈은 자신이 왜 열이나는지 조차 감을 잡지 못하는 밀레시안을 놀리며 은근히 아침의 걱정에 대한 보상을 받아내고 있었다.

당연히 지치겠지, 날씨에 상관없이 문게이트를 놔두고 도보로 이동하질않나, 열흘을 꼬박 오스나사일에서 노숙하지를 않나. 평소 지칠줄 모르던 강철의 체력의 밀레시안은 아마 자신이 왜 검은너구리떼에게 3번이나 행동불능을 당한지도 이해하지 못할터였다. 그저 자신이 맨손으로 싸웠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겠지만..


“…..? 먹는데 볼찌르지 말아요”


카즈윈이 버섯으로 가득찬 밀레시안의 뺨을 꾹 하고 찔러들어오자 밀레시안은 귀찮다는표정으로 몸을 기울이며 카즈윈에게서 멀어져갔다. 

먹기 싫다고 투덜투덜 거리고 있었지만 어느새 2인분의 스튜그릇은 완식, 국물이라 하기엔 다소가 무리가 있는 음식이였지만 뜨근한 음식을 먹어서인지 밀레시안은 이마에 맺힌 땀을 기분좋게 닦으며 카즈윈에게 손을 내밀어보였다.

말을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내밀어지는 시원한 물한잔에 밀레시안이 환한미소를 지어보였다.


“나 이제 다 나은것 같아요”

“아직 몰라”

“몸도 제법 가뿐하고 이제 열도 안나는것 같은데?”

“이마가 땀투성이잖아. 혹시 몰라”

“이거 더워서 나는 땀이에요. 봐봐요 카즈윈은 민소매 하나뿐인데 나는 긴팔에 긴바지에 담요까지 덮고..!”

“그렇게 막 몸을 식히다간 또 열난다.”


“아 내가 무슨 허약체질인줄 아나?!”


카즈윈의 연다른 부정에 밀레시안은 버럭 화를 내며 담요를 벗어던졌지만 곧 차가운 카즈윈의 시선에 주섬주섬 다시 원래의 도롱이모습으로 돌아온뒤 자리에 드러누웠다.

한숨 자고 일어나면 이제 정말 다 벗어던질 거라고 이를 가는 밀레시안에게 카즈윈은 말없이 이마를 그릇을 들어올린뒤 테이블을 거둬내리고는 허리를 굽혀 이마께로 손을 뻗었다.


“그래, 그러던가”


얼른 담요 안덮냐고 노려보던 시선과는 다른 다정안 말투, 이마를 쓸어넘기는 손바닥 가득 아직 채 식지않은 땀이 묻어났지만 불쾌한 기분은 아니였다. 

신경쓰이는 것은 오히려 밀레시안쪽인지 밀레시안은 손을 피하려 이리저리 고개를 기울이지만 카즈윈은 그 기울임을 따라 손을 움직여 밀레시안의 머리카락을 한쪽 결로 정돈했다. 

섬세한 손끝이 귓바퀴를 스치자 밀레시안의 뺨이 다른 열기로 붉게 달아올랐다. 카즈윈의 입가에도 가벼운 미소가 떠올랐다.

이렇게, 너는 가끔 아프고, 너는 가끔 약해지며, 투정을 부리고, 나에게 기대어온다. 

영웅을 너머 반신으로 까지 불리며 기적같은 일들을 일으키고 다니는 너에게 이런모습이 있을것이라고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카즈윈은 말없이 밀레시안의 훑어모은 머리카락을 귀뒷쪽으로 쓸어넘겼고 온화하던 입가의 미소를 한순간에 꺼트리고는 단호한 목소리와 함께 몸을 일으켰다.


“이제 자.”


쫌생이, 다잡은 분위기끝에 그렇게 아무것도 안하고 가는거냐며 밀레시안이 투덜거렸지만 카즈윈은 못들은척 몸을 돌려 병동에서 벗어났다. 

저녁에 뭔가 맛있는걸 먹기 위해서는 일단 해치워야 할 냄비가 한가득이였다.


https://twitter.com/teclatia/status/883899305567952897

07.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