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비밀레)데이트
“톨비쉬는 잘생겼습니다”
툭, 하는 소리와 함께 밀레시안이 잡고있던 컵을 놓쳤지만 깨지는 유리의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낙하하는 컵을 요령좋게 잡아낸 금발의 남성이 매력적인 미소를 지으며 컵을 테이블로 돌려놓았다.
손가락을 미끄러트리며 잔의 가장자리를 기울이는 기사의 옷차림은 평소와는 다르게 가벼운 천옷에 푸른톤으로 화사한 금발을 더욱 돋보이게 만들었다. 잔을 끌어당기는 밀레시안의 표정을 본 톨비쉬는 뻔뻔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지금 본인을 3인칭으로 칭한거에요?”
“그리고 상냥하고 유능하기로 유명하죠”
“가볍고 팔랑거리는 사람이라고 소문난게 아니라?”
“설마”
밀레시안의 끊임없는 지적에도 톨비쉬는 꿋꿋한 미소를 유지하며 제 할말만을 끝마쳤다. 밀레시안이 흔들리는 시선을 진정시키려 잔을 들어 입술을 축이는 모습에 톨비쉬가환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무거운 짐을 벗어 놓은 여행자마냥 오래간만의 휴가를 한껏 즐기는 구김살 없는 미소였다.
임시임무도 예비 대기령도 없는 정말 순수한 자유시간. 조장급들에게만 적용되는 특별 호출도 없었고 따라붙은 조원들도 없었다. 오롯하게 연인과 즐기는 데이트에 톨비쉬는 느긋하게 농담을 걸며 밀레시안의 손가락에 장난을 걸었다.
얽히고 풀기를 반복하며 귀찮게 구는 긴손가락은 영락없이 놀아달라고 꼬리치는 강아지의 꼬리와 닮아있었다.
“음, 그리고 또 뭐가 있었더라. 아 융통성 있는 엘베드의 조장. 기사중의 기사”
“자기입으로?”
“설마요. 모두 밖에서 들려온 저에대한 평가들입니다. 그래도 양심상 기사들의 아이돌은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만?”
“지금 말했네요, 아이돌씨.그럼 이제 싸인이라도 해주실래요?”
“당신이 원한다면”
밀레시안의 비꼬는 농담에 톨비쉬는 감고있던 손가락을 풀어 밀레시안의 손바닥 깊숙한 곳을 손가락으로 긁어내렸다.
간지러우면서도 짜릿한 느낌에 밀레시안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밀어내는 손을 아쉬운듯 바라보며 톨비쉬가 장난스럽게 한쪽 눈을 깜빡인다. 푸르른 벽안과 맑은 오전의 하늘이 퍽이나 잘 어울리는 날이였다.
컵속의 얼음이 달칵거리며 시원한 소리를 내었다. 톨비쉬는 이제서야 자신의 음료가 생각이 났다는듯 빨대를 휘저어 바닥에 가라앉은 레몬조각을 끌어올렸다. 투명한 탄산수안에서 푸른 민트잎과 선명한 색채의 레몬이 경쾌하게 오르내렸다.
한쪽 팔꿈치를 테이블에 기댄채로 턱을 괴인 톨비쉬가 떠오른 레몬을 짓찧는 동안 밀레시안은 찬찬히 사복차림의 톨비쉬를 눈에 담았다.
평소와 같이 깔끔한 헤어스타일과 반듯하게 다린 옷깃, 전체적으로는 늘 보던 그의 모습이지만시원한 푸른색 옷감에 간간히 놓여진 자수때문인지 어딘가의 부자집 도련님, 혹은 젊은 청년실업가 같은 분위기였다. 그런 험한 일은 하나도 안 해본것 같은 단정한 얼굴이면서 팔뚝이나 어깨는 여느 모험가 못지 않은 단단한 선을 그린다.
늘 눈앞에 서있던 곧은 등, 그리고 반듯한 자세. 하지만 오늘은 편안하게 기대어 앉은채 음료수를 마시며 마주 앉아있다. 갑옷이 없는탓에 시선을 따라 흐르는 윤곽선이 좀더 세밀하고 정교하게 덧그려졌다. 낯이 익으면서 새로운 모습, 하지만 불쾌하거나 어색하지는 않는 느낌이였다. 호기심, 혹은 탐구심이 가득한 밀레시안의 눈이 부지런히 움직여 톨비쉬의 옷깃에서 어깨를 따라 손끝으로 향했다.
밀레시안의 시선을 눈치챈건지 톨비쉬는 부지런히 움직이던 빨대를 가만히 멈추어 입술에 지그시 눌러 물었다.
시선이 마주치기를 기다렸던 건지 눈이 마주치자 샐쭉하니 웃는 푸른눈이 기쁜듯이 물었다.
“그래서 어떻습니까? 당신의 눈에 비친 저는”
“어느 부분부터 말해줄까요?”
“각각 다 다른가요?”
“글쎄요”
밀레시안의 아리송한 대답에 톨비쉬는 기대어 앉았던 자세를 바로세우며 밀레시안의 손을 잡아끌었다. 테이블 중간에 놓인 밀레시안의 손을 찬찬히 들여다보며 손톱의 모양을 덧그리는 톨비쉬의 손길이 아주 신중하고 조심스러웠다. 밀레시안이 뭔가 묻었냐는듯 고개를 갸웃거리자 톨비쉬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밀레시안의 손가락을 매만졌다
“가끔 궁금해 질때가 있습니다. 엘베드 조장의로서의 저와 알반 기사단의 저, 당신과 함께하겠다고 맹세한 순간의 나, 그리고 당신의 손을 맞잡은 나. 모두 저의 역할이자 나 자신의 모습들이긴 하지만 분명히 선은 그어져 있는 상태이지요. 그 여러가지의 이름들 중에서 당신의 눈에 비친 톨비쉬는 어떤 톨비쉬일지. 당신의 마음속에 남아있을 톨비쉬는 누가 될지..”
“누구를 선택하는지에 따라서 당신에게 의미가 달라지나요?”
“글쎄요”
톨비쉬가 밀레시안의 말투를 흉내내며 웃자 밀레시안도 피식 웃으며 손가락을 모아쥐었다. 하지만 그보다 한발 앞서 톨비쉬는 밀레시안의 손을 끌어당겨 손끝에 입을 맞춘다. 가볍고 달콤한 키스세례에 맞추어 낯간지러운 소리가 간간히 들려왔다.
손을 잡힌 당사자는 물론이고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오히려 부끄러워 하며 고개를 돌리지만 톨비쉬는 개의치 않아하는 얼굴이였다.
밀레시안도 시선을 인식한건지 그만해요, 하고 가벼운 타박을 하며 손을 뻗어 톨비쉬의 입술을 밀어내었다. 만지는것 만으로도 시트러스계의 상큼한 향기가 터져나오는것 같다.
갑작스럽게 햇살이 너무 뜨거운것 아닌가 하는 착각에 밀레시안은 재빨리 손을 거두어 자신의 잔을 움켜쥐었다. 톨비쉬가 아쉬운든 입매를 매만졌다.
“아직도 스킨쉽이 부끄러운 모양이네요”
“그런게 아니라..”
“아니면 주변사람들의 시선이 신경쓰여서인가요?”
톨비쉬가 씩 하고 웃자 밀레시안이 가볍게 테이블아래에서 그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당신이 제일 부끄러워요”
“난 즐거운데 말이죠”
아프지는 않지만 장난을 걸어와서인지 톨비쉬는 솜씨 좋게 뻗어나온 밀레시안의 다리를 걸어 자신의 다리사이에 단단하게 고정시킨다.
빠지지 않는 다리에 밀레시안이 당황한듯 고개를 들자 톨비쉬는 언제그랬냐는듯 다리를 풀며 탄산수를 홀짝거렸다. 종아리를 따라 슬그머니 올라왔던 바지의 감촉은 덤. 나지막한 목소리로 변태라고 속삭인 밀레시안이 입을 삐죽거렸다.
“분명 처음에 맹세는 이런의미는 아니었던것 같은데 말이죠”
“흐음, 일수도 있고 아닐 수 도 있었습니다. “
“또 두루뭉술하게 넘어간다”
“넘어가려는게 아니라 정말 딱잘라 말하기가 애매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당신에게 반한 것은 아주 오래전의 일이였으니까요.”
“오래 전…?”
“노코멘트입니다”
“그렇게죠.. 늘 그래왔듯이”
“기밀이니까요.”
톨비쉬가 이건 명확하게 말 할수 있다는 듯이 가슴을 펴고 이야기했다.
밀레시안이 다시한번 빠르게 톨비쉬의 정강이를 차고 자신의 의자 안쪽으로 가지런히 발을 내려놓았다.
아까와같은 장난에 당하지 않기위해서인지 제법속도가 붙은 발차기에 톨비쉬의 입에서 짧은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크흠.. 그래서 오늘 저는 어떻습니까”
“글쎄요? 나도 기밀이에요”
“밀레시안,”
“나만 말하는건 불공평하잖아요”
밀레시안의 역공에 톨비쉬는 적잖이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밀레시안이 그의 과장된 반은에 눈썹을 치켜뜨자 톨비쉬는 놀랍다는듯이 고개를 내저었다.
“혹시 오늘에서야 반한겁니까?”
“와, 여전히 자기입으로 그런말을..”
“내가 당신에게 구애한게 몇 개월인데 고작 사복한번 입었다고..?”
“구...ㅇ.. ”
“당신 정말 제 얼굴을 좋아하는군요?”
밀레시안이 그만하라는 듯이 타이르는 톤으로 톨비쉬를 부르지만 톨비쉬의 입매는 즐겁다는 웃음기를 숨기질 못하고있다.
밀레시안이 아무리 입을 삐죽거리고 고개를 돌리고 시선을 피해도 곁눈질로 자신을 향하고 있는 것을 눈치채지 못할 수가 없었다. 솔직하지 못하면서도 시선은 눈동자위로는 호기심이 가득 떠 있는 모습에 자꾸만 놀리고싶은 마음이 들어버렸는지 톨비쉬는 짐짓 상처받은 얼굴로 한숨과 함께 고개를 돌렸다. 입을 가리는걸 잊지 않은 책략가가 혼신의 연기를 펼친다.
“저는 당신이 어떤 모습이라도 상관치않는데.. 이건 조금 충격이군요.”
“...윽.....”
“만일 제가 이 얼굴이 아니였다면 당신은 다른 사람을 선택했을까요?”
“그...그럴리가..”
밀레시안이 톨비쉬의 분위기가 가라앉은걸 느꼈는지 조금 동요하며 톨비쉬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톨비쉬의 얼굴과 테이블의 거리를 살펴보던 밀레시안이 초조한 얼굴로 살짝 몸을 일으켰다. 조금만 더, 더 가까이.
톨비쉬가 속으로 타이밍을 재며 언제 밀레시안을 잡아챌까 고민하는 사이 가까이 다가온 밀레시안이 먼저 톨비쉬 쪽으로 손을 뻗었다.
부드럽게 볼을 감싸쥐는 온기에 깜짝 놀랐지만 톨비쉬는 몸을 슬쩍 뒤로 뻈던 자세에서 밀레시안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밀레시안과 시선을 맞추었다. 명연기, 완벽한 표정관리. 스스로도 자화자찬할 희대의 감정연기였지만 밀레시안의 손가락은 그보다도 빠르게 움직여 톨비쉬의 볼을 휙 하니 꼬집었다.
“있겠어요? 어휴 이 인간 또, 연기한다. 또”
“아, 아픕니다. 아파요 밀레시안”
“내가 당신이랑 함께한게 시간이 얼마인데 또 연기야. 당신 진짜 그러다가 아본에 한번 끌려가 볼래?”
“이제 안속는겁니까”
“예전부터 안 속았었습니다”
톨비쉬가 거짓말, 이라고 속삭이는 것을 무시한 밀레시안이 제자리로 돌아가 음료를 홀짝였다. 아직 얼얼한 볼이지만 그렇게 싫지 않은 느낌은듯 톨비쉬는 퉁하고 부운 얼굴로 볼만 두어번 쓸어보고서는 밀레시안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밀레시안의 시선이 다시 톨비쉬에게 향한다.
“그래서, 오늘은 뭘 더 해 볼까요?”
“계획같은거 없어요?”
“없습니다. 오늘은 아무것도 계산하고 나오지 않았으니까요”
톨비쉬가 가볍게 웃으며 밀레시안과 눈을 맞추었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아무것도 재어보지 않고 오로지 당신을 만난다는 사실 하나만을 생각하고 나왔습니다. 모처럼 귀중한 휴일인데 당신이외에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으니까요”
평소의 습관을 떨쳐버려서였을까, 일부러 머릿속을 비우고 나와서였을까 초조한듯 불안감을 나타내는 손가락이 부지런히 테이블을 두드렸다. 아마 본인도 인식하지 못하는 버릇이리라. 밀레시안은 멀뚱히 톨비쉬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그의 손을 맞잡았다.
갈곳을 잃은채 이리저리 방황하던 손끝들이 드디어 짝을 만났다는듯 안정을 되찾고 다시 밀레시안의 손가락사이를 파고들었다.
응원, 위로, 고백, 혹은 연민. 수많은 감정이 전해지기엔 너무나도 짧은 스킨십이였지만 톨비쉬에겐 그마저도 사랑스러워 보일 뿐이였다.
톨비쉬가 나지막히 대답했다.
“그래요, 아무것도. 당신이외에는.”
맞잡은 온기속에서 안타까움과 그리움, 그리고 무겁고 간질거리는 감정의 부스러기들이 흘러들어온다. 언제나 여유로워 보이던 엘베드의 조장에서 톨비쉬라는 사람으로 돌아온 그가 얼마나 지쳐있었는지, 가끔씩 그의 눈빛에서 보이던 그늘이 무엇이였는지, 밀레시안은 아무말 없이 톨비쉬의 손을 끌어당겼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톨비쉬는 순순히 손을 내어주면서도 의문스러운 얼굴로 밀레시안에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끌어당긴 손은 테이블을 떠나 밀레시안쪽으로, 시선을 맞추던 밀레시안의 눈꺼풀이 가볍게 내려앉았다.
촉, 하고 가볍고 짤막한 입맞춤이 톨비쉬의 손등에 닿았다 떨어졌다.
“하,”
“....으으..”
“하하,하하하”
숨을 들이마시는건지 내쉬는건지 톨비쉬가 짧게 감탄사를 터트리며 눈을 크게 떴다.
스스로의 행동이 부끄러운 밀레시안은 톨비쉬의 손을 자신의 뺨에 갖다대며 홍조를 숨기려 애를 쓴다 .바보같이 크게 웃음을 터트리는 톨비쉬의 미소에 주변에 앉아있던 다른손님들의 시선이 점차 밀레시안들 쪽으로 향한지 오래. 톨비쉬의 미소가 점점 환해지자 밀레시안은 도저히 못참겠다는 듯이 눈을 꼭 감았다 뜨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와중에도 얽혀있는 손가락 덕분에 톨비쉬의 팔도 휙하니 끌려 올라간다.
“자리, 옮겨요. 당장”
두번다시 이 카페에 들리지 못할꺼라고 투덜거리는 밀레시안의 뒤를 쫓아서 톨비쉬가 경쾌한 발걸음으로 걸어나갔다. 그리브의 무거운 철컥임이 아닌 가죽 단화의 가벼운 발자국소리가 사람들의 말소리 사이로 스며들었다. 어렵지 않게 밀레시안의 발걸음을 따라잡은 톨비쉬가 자연스럽게 밀레시안의 어깨를 감싸쥐며 귓가에 속삭였다.
"어디로든지, 나의 별."
때는 어느 날 좋은 날의 정오, 영웅도, 기사도 아닌 평범한 연인 한쌍이 행복한 미소와 함께 인파속에서 섞여들었다.